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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공간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한 이유!

by 글로벌맨 2024.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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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4세 이사샤 (사샤가 부르는 아리랑 캡쳐)

 

여러분은 고려인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혹시 고려인에 대해 어떤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나요?

 

조선족과 고려인은 시작은 비슷했지만 역사의 과정을 살펴보면, 그 결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조선족은 중국의 문화대혁명 이후, 소수민족의 문화 말살 정책으로 인해 자의 반 타의 반 중국에 동화되어 갔지만, 중앙아시아에 분포된 고려족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민족"이라는 그 명맥과 뿌리를 잊지 않기 위해 지금까지도 많은 노력을 해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잘 몰랐던 고려인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한 이유!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한 사건은 한국 근대사와 소련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 중 하나입니다. 이 사건은 1937년에 발생한 강제 이주를 중심으로 하며, 당시 소련 내에서 고려인들이 겪은 탄압과 고난을 잘 보여줍니다.

 

"고려인"이라는 용어는 1937년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국내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강제이주 전과 후로 "한인"과 "고려인"으로 구분해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고려인 대부분 사람들은 과거 고구려가 위치했던 한반도 이북 지역 출신인 것에 기인해 오늘날에도 스스로를 "고려인", "고려사람"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

1. 고려인들이 소련에 거주하게 된 배경

한인들은 언제부터 어떠한 이유로 극동 지역에 이주하여 살았을까요?

연해주의 "지신허"라는 마을에 첫 이주가 시작된 시기는 1864년경으로 약 60여 가구가 처음으로 정착하여 그곳에서 삶의 터전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후, 1867년에 약 1,000여 명의 한인들이 거주하였으며, 1869년 조선 북부의 홍수와 기아로 인해 약 4,500여 명의 한인들이 대거 연해주로 이주를 했습니다. 

 

이 시기를 시작으로 러시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이후인 1914년경 무렵에는 총 64,309명이 연해주 일대에 거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조선의 시대상황을 살펴 볼 때, 독립활동가를 포함한 많은 수의 한인들이 비공식적으로 국경을 이탈하여 거주한 것으로 짐작하면 거주 인원은 이 수치를 훨씬 상회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주요 이주의 원인은 1862년 조선 철종(13년)에 전국적으로 발생한 진주농민항쟁입니다. 삼정문란​, 탐관오리 횡포와 폭정, 군 복무의 어려움, 당시 자연재해로 인한 기근 등 복합적으로 작용한 듯 합니다. 이후, 일본의 조선 침략과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조선에서는 토지 수탈과 경제적 어려움이 심화되었고, 많은 한인들이 이를 피해 연해주로 이주를 선택했습니다.

연해주 항일독립군

 

연해주에 정착한 고려인들은 일제감점기 때, 그곳에서도 독립을 위해 항일독립군들이 활발하게 활동하였습니다. 홍범도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활동을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기입니다. 1895년경부터 의병에 뛰어들어 함경북도 갑산, 무산 등지 일대를 중심으로 연해주 항일독립군들이 활동을 하였습니다.

 

러시아 극동 지역인 연해주 지역은 지리적으로 한반도와 가깝고 땅이 비옥하여 한인들이 이주하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연해주를 중심으로 극동 시베리아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은 20만 명이었습니다.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며 공동체를 형성해 나갔습니다. 한인들은 연해주 지역에서 러시아 정부와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를 유지했습니다. 러시아 현지인들은 이들을 "까레스키(한민족)"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혁명과 소련의 성립 이후, 고려인들은 정치적 변화에 직면하게 됩니다.

강제 이주 당시 열차 탑승을 기다리는 한인들

2. 1937년 강제 이주의 배경

고려인의 역사는 러시아의 극동지역 연해주로 부터 시작됩니다. 

1930년대 소련은 스탈린 체제 하에서 급격한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소련은 불모지였던 연해주를 비옥한 땅으로 만든 한인들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고, 중앙아시아에도 진출시켜 산업화와 농업 집단화 추진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한인들을 이주를 시킬 명분이 약했습니다. 그러던 중 중일전쟁으로 인해 일본 제국이 만주를 점령한 후, 점차 소련의 영토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스탈린 정부의 수뇌부들은 고려인들이 일본 제국과 내통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심을 품고 있었으며, 고려인들이 일본의 간첩활동을 했다는 근거 없는 사실을 유포해, 수많은 한인 지도자들을 잡아서 숙청하였고 고려인들은 "불신"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소련 수뇌부들은 고려인들을 극동 지역에서 소련 내의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킬 명분이 생겨 이주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1937년 8월 21일 소련 인민위원회는 스탈린의 승인을 받아 곧바로 시행되었습니다. 
포고령은 "극동의 모든 한인은 카자흐와 우즈벡으로 재배치한다. 이주는 즉각 시행하되 1938년 1월 1일까지 완료한다. 한인은 동산과 가축을 동반해도 좋다, 다만 포기할 경우 보상한다. 한인 이주를 위해 3,000명의 병력을 동원한다"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이렇게 해서 연해주를 비롯해 극동시베리아의 한인들의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가 시작되었습니다. 전체 이주 인원은 소련 공식 집계로 17만 1,781명입니다. 하지만 통계에 잡히지 않은 인원까지 포함하면, 20만 명 내외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그러나 이주 명령은 즉각 시행되지 않고, 20일간 지체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한인 농가가 추수를 마치길 기다렸습니다. 한인들이 수확한 농산물을 빼앗기 위한 책략이었습니다. 당시 시베리아 연해주 일대는 8~9월이면 모든 추수가 끝났습니다. 소련은 수십년동안 터를 일구며 살아 온 한인들을 삶의 터전에서 모두 쫒아냈습니다.

3. 강제 이주의 과정

1937년 9월 부터 12월말까지 강제 이주가 급박하게 시작되었고, 당시 이주는 매우 비인도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한인들이 밀집한 "포시예트"와 "그로데코보" 지역의 한인들이 우선 대상이었고, 그 인원은 1만 1,807명이었습니다. 이주시 사전 통보도 전혀 없었습니다. 옷가지 몇 개와 식량 일부만 가지고 한인들은 열차에 탔습니다. 나머지 가재도구, 주택 등은 교환증 하나만 달랑 주었습니다. 여행경비는 1인당 하루 5 루블, 기껏해야 한 사람이 370 루블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말 잘 듣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주었습니다.

 

소련의 비밀경찰(NKVD) 요원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대상자에게 이주를 통보했습니다. 비밀경찰은 간단한 것만 소지하고 30분 내에 자신을 따라올 것을 명령했습니다. 당연히 갑작스러운 이주명령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 한인들도 있었습니다. 이주에 불만을 품고 거부한 사람들은 체포되었습니다. 그 인원이 2,500명으로 추정되며, 대부분 처형되었습니다. 반발하는 한인지도자들을 본보기로 처형해 저항할 수 없게 만든 후, 두 달 만에 20만 명의 한인들을 사지로 내몰았습니다. 소련공산당이 저지른 인종청소 범죄였습니다.

 

당시 기차역은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강제로 실리는 고려인들로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한인들은 거의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왜 끌려가는지,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베리아횡단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실려서 옮겨졌습니다. 기차는 주로 짐이나 동물을 실어나르던 나무로 된 화물용 기차였습니다. 

힌인들을 실어 나르던 나무로 된 화물열차

 

한인들을 실은 기차의 이동 거리는 6,500km, 124대의 열차가 동원되었고, 기차는 혹독한 추위속에서 40여 일동안 달리며 크즐오르다, 타슈켄트, 우즈베크 등지로 분산되어 정착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생이별을 했으며, 기차 안에서 출산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혹독하게 추운 기후, 화장실도 없는 열악한 위생 상태, 식량 부족, 이동 중 굶주림으로 인한 영양실조, 폐렴과 질병에 걸리거나 열차 탈선등으로 인해, 열차 이동 중 사망한 사람만 약 21,000명 이상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열차에서 사망한 사람의 시신은 열차밖으로 내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1937년 10월 25일, 극동지역 한인들의 이주가 완료되었습니다. 총 3만6,442 가구 17만 1,781명이 124개의 집단수송열차로 이주되었습니다. 한인 이주는 극동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부랴트, 치타 등 중부시베리아의 한인들도 강제로 이주해야 했고, 심지어 북유럽 핀란드 옆에 있는 무르만스크 거주 한인들도 알타이 크라이로 이주시켰습니다. 그래서 강제 이주된 한인 수가 20만 명이 넘는다는 추산이 나옵니다.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의 목적지는 주로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분산 배치되었습니다. 이 지역들은 당시 소련의 일부로,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으로 황폐한 지역이었습니다. 고려인들은 이 지역의 열악한 조건에서 생존해야 했습니다.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이동한 경로

4. 강제 이주 이후 고려인들의 삶

우즈베키스탄에 배치된 한인들은 1만6,272가구 7만 6,525명이고, 카자흐스탄에 배치된 한인들은 2만 170 가구 9만 5,256명이었습니다. 

 

강제 이주 이후, 고려인들은 새로운 지역에서 생존을 위한 큰 도전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도착한 중앙아시아는 생소한 환경이었고, 언어와 문화적 차이도 매우 컸습니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들의 공동체를 유지하며, 점차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갔습니다.

 

당시 소련은 중앙아시아에서 쌀과 목화사업을 대규모로 재배하는 사업에 돌입했는데, 고려인의 집단 농장에서는 소련이 지정한 쌀과 면화 생산을 매년 두 배이상의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소련의 7개년 개획을 4년 만에 달성했을 정도입니다. 소련은 고려인을 근면성실하고 건실한 민족으로 평가했으며 평판도 좋아졌습니다. 이로 인해 금지되었던 고려말도 다시 사용하게 되고, 민족어 교육도 허용하게 됩니다.

 

중앙아시아에서 고려인들은 이후, 교육과 문화, 경제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고려인들은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서 쌀 농사에 크게 기여하여 지역 경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고려인들은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한국말을 사용하는 학교와 신문을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이주 후 벼농사를 짓는 고려인 가족

5. 강제 이주가 이루어진 국가들

카자흐스탄에 정착한 고려인

카자흐스탄은 당시 고려인들이 강제 이주된 주요 국가 중 하나였습니다. 이 지역은 황폐한 갈대밭과 사막 지대로 이루어져 있어서 이주 초기 고려인들에게는 매우 혹독하고 척박한 환경이었습니다. 정착과정에서 먹거리의 부족과 질병으로 인해 노약자들이 거의 매일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갔습니다.

고려인들의 최초 정착지였던 카자흐스탄 우슈토베 (지금은 당시의 흔적과 공동묘지만 남아있다)

 

나무 한그루 없는 황량한 카자흐스탄 우슈토베 에 버려진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의 혹독한 추위를 피하기 위해 땅을 파서 토굴을 짓고 생계를 유지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는 막막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카자흐인 유목민들이 이를 불쌍히 여겨 가끔 가져다준 고기 덩어리로 죽어가는 이들의 숫자를 줄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카자흐인들은 1930년대 초 대기근으로 250만명이 사망한 비극을 겪은 직후였음에도 이주 고려인들의 정착을 다방면으로 도움을 주었습니다. 여러 자료들에 의하면, 카자흐인들이 고려인에게 집을 비워주거나 당나귀에 고기와 빵을 싣고 와 나눠주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현재도 고려인들은 당시 카자흐인들의 환대와 친절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고 낮선땅 카자흐에서 고려인들은 눈물과 피와 땀으로 이곳에서 땅을 개간하고 가져 온 볍씨를 뿌려 농업을 시작했습니다. 근면함과 성실함으로 특히 쌀농사를 성공적으로 정착시켜 카자흐스탄에서 중요한 경제적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고려인들이 이주열차에 실려 허허벌판에 도착한 시점은 마침 겨울이 시작되던 때라 추위와 홍역 등으로 어린이 60%가 사망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서로의 체온으로 몸을 의지하고, 흙을 이겨 반죽한 구운 타일로 온돌을 만들어 중앙아시아의 혹독한 겨울을 가까스로 버텨냈다고 합니다.

카자흐스탄 바스토베에 있는 고려인 공동묘지 비석

 

지금도 고려인들이 이주 후 첫 겨울을 지냈던 카자흐스탄 바스토베 언덕에는 땅굴과 공동묘지가 남아 있습니다. 이 땅굴 자리에 세워진 비석에는 한글로 "이곳은 원동(연해주)에서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이 1937년 10월9일부터 1938년 4월10일까지 토굴을 짓고 살았던 초기 경착지이다"라는 글씨가 한글로 새겨져 있습니다.(고려인들은 연해주를 원동이라 불렀습니다.) 

 

카자흐스탄에 정착한 고려인들은 이후에도 소련의 정책 변화에 따라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활동하게 되었으며, 교육과 문화적 측면에서도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오늘날 카자흐스탄에는 약 10만 명 이상의 고려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은 카자흐스탄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소수 민족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고려인의 영웅으로 불리우는 김병화씨(오른쪽)

우즈베키스탄에 정착한 고려인들

우즈베키스탄 또한 고려인들이 강제 이주된 주요 지역 중 하나였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의 황량한 갈대밭에 버려진 고려인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거친 갈대를 베어 움막집을 짓고, 황량한 갈대밭을 개간해 목화밭으로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우즈베키스탄 정착 당시 고려인 대부분은 집단농장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고려인의 영웅으로 알려진 김병화씨가 고려인들과 함께 땀과 눈물로 성공으로 이끈 대표적인 목화 농장입니다. 농장은 황무지를 옥토로 바꾸는 그의 지도 덕분에 다른 지역 농장보다 월등한 수확량을 이뤄냈습니다. 이후 그는 1948년과 1951년 "사회주의 노동 영웅" 칭호를 두차례나 받았습니다.

 

고려인들이 이곳으로 이주 후 정착하여 농업과 산업에 종사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우즈베키스탄에서 고려인들은 목화 농업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지역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에 정착한 고려인들은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계속했으며, 한국말로 발행된 신문과 잡지, 그리고 고려인 학교 등이 운영되었습니다.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에도 많은 고려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중요한 공동체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카자흐스탄 한국어 수업

6. 강제 이주의 영향과 현재의 고려인

강제 이주는 고려인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들은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서 살아남아야 했으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중앙아시아에서 고려인들은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를 지키려는 노력을 지속해 왔으며, 이러한 노력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강제 이주 이후 고려인들의 정체성은 복잡해졌습니다. 소련의 영향 아래에서 많은 고려인들이 러시아어를 배우고, 소련 문화에 동화되었습니다. 또한,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독립과 함께 고려인들의 법적 지위와 사회적 위치도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일부 고려인들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기도 했으며, 또 다른 이들은 러시아나 다른 국가로 이주하기도 했습니다.

카자흐스탄 고려인들

7. 고려인 강제 이주의 역사적 의의

고려인들의 강제 이주는 소련 역사에서 소수 민족에 대한 억압적 정책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입니다. 스탈린 체제 하에서 고려인들은 아무런 구체적인 증거 없이 일본과의 내통을 의심받아 강제 이주되었으며, 이는 소련의 정치적 억압과 인권 침해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사건은 한민족이 타의적으로 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집단을 형성하는 한 축을 이루며, 한민족의 강인한 생명력과 문화적 적응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살아남아 발전하며 자신들의 문화를 지켜왔으며, 이는 한민족의 저력과 연대감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소련 해체후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이 극동시베리아 연해주로 되돌아 길 것인지를 조사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돌아가지 않기로 했습니다. 중앙아시아에서 정착해 잘 살고 있고, 소련의 연해주 당국이 고려인의 복귀를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한국으로 돌아올 것도 고려했지만, 현실의 상황은 녹녹치 않아 대규모의 본국 이주는 없었습니다. 현재 러시아를 비롯한 중앙아시아에 분포되어 있는 고려인은 50만 명입니다. 고려인의 뿌리는 150년이지만, 고려인이라는 공식명은 연해주 강제이주 이후부터 입니다. 80여 년의 세월 동안 고려인은 1세대부터 5세대까지 그 뿌리를 내리며 완전하게 정착하여 살아오고 있습니다.

 

8. 한인들을 강제이주시킨 담당자들의 최후

한인 강제이주를 담당한 사람들은 스탈린에게 개처럼 충성했지만, 끝내 숙청을 당했습니다. 한인 이주 총책을 담당했던 "예조프"는 1939년 3월 모든 지위에서 해임되었고, 4월 10일 체포되어 정부기금 착복, 독일 스파이 혐의를 받아, 1940년 2월 4일 모스크바 근교에서 비밀리에 처형되었습니다.

 

한인 강제이주의 실무를 주도한 사람은 NKVD 극동담당경찰 총책은 "겐리히 류쉬코프(Genrikh Lyushkov)"였습니다. 그는 스탈린 정권에 충성했지만 끝내 목숨에 위협을 느끼고 1938년 6월 일본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는 연해주 한인에게 일본 스파이 혐의를 뒤집어 씌워 강제 이주에 앞장선 인물입니다. 그는 일본에서 부역하다 일본 패망직후인 1945년 9월 19일 사망했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해 자살했다는 설, 총살당했다는 설이 있지만, 총에 의해 죽은 것은 확실합니다.

 

<본 블로그는 굿모닝아시아 웹사이트와 콘텐츠를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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