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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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흥선대원군(1821~1898)은 조선 후기의 핵심 정치가이자 고종의 생부로서 19세기 조선의 격변기를 주도한 인물입니다. 본명은 '이하응'으로, 남연군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1863년 고종이 즉위하자 섭정으로서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은 대내적으로는 왕권 강화와 개혁 정책, 대외적으로는 쇄국 정책으로 특징지어지며,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조선의 자주성을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집권 이전의 생애와 권력 장악

1821년 한양 서부 연희방에서 태어난 흥선대원군은 왕족 신분이었으나 가계가 몰락한 상황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며 '궁도령'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극에 달하던 시기, 그는 고의로 무능함을 가장하며 정계에서 생존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1864년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고종을 왕으로 추대하며 섭정 자리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조대비(신정왕후)의 지지를 받아 세도를 잡은 안동 김씨 세력을 제압했습니다.

 

개혁 정책과 통치

집권 후 그는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 권력 구조 개편: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 중심 체제를 복원하며 삼군부를 설치해 군사력 강화
- 재정 확보: 양반층에게도 세금을 부과하는 '호포제' 시행과 서원 철폐(전국 650개 서원 중 47개만 남김)
- 사회 개혁: 양반의 도포 길이 단축, 담뱃대 축소 등 사치품 규제 및 기강 확립
- 문화 사업: 경복궁 중건(1865~1871)을 통해 왕권 상징성을 재확립

 

특히 서원 철폐 과정에서 자신을 모욕한 화양동 서원 유생들을 처형하는 강경책을 보였으며, 이는 유림 세력의 격렬한 반발을 샀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사창제' 도입으로 곡물 유통 체계를 개편하며 민생 안정을 꾀했습니다.

 

대외 정책과 갈등

그는 쇄국 척왜 정책을 고수하며 프랑스(병인양요, 1866)와 미국(신미양요, 1871)의 무력 침략에 맞섰습니다. 그러나 1873년 고종의 친정 선포로 실각한 후, 개항을 주장하는 명성황후(민씨) 세력과의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일시적으로 권력을 회복했으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납치되어 천진에서 3년간 유폐되기도 했습니다.

 

명성황후 암살 사건

1895년 을미사변 당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와 결탁해 명성황후 제거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사변 당일 새벽 일본 헌병대와 함께 경복궁에 입궐했으며, 암살 후 고종에게 왕비의 사망을 알리며 장례를 치르도록 압박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국내외적 여론이 악화되자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책임자로 지목해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켰습니다.

 

종교·문화적 활동

정치적 행보와 달리 불교 후원에 적극적이었습니다.

- 용궁사 중창: 집권 전부터 불교와 인연을 맺으며 사찰 복원 시작
- 보덕사 창건: 고종 즉위 기념 사찰 건립
- 흥천사·화계사 지원: 편액 제작과 종 주조 지원을 통한 불교계 영향력 확대
이러한 행보는 유교 중심의 조선 사회에서 이례적이었으며, 민심 수습과 사상적 균형 도모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분석됩니다.

 

말년과 사후

1898년 2월 22일 향년 78세로 사망할 때까지 고종과의 갈등은 지속되었습니다. 사후 '흥선헌의대원왕'으로 추봉되었으며, 대한제국 수립(1897) 직전까지 생존해 황제의 부친으로서 제도적 위상을 정립했습니다.

 

그의 개혁 정책은 왕권 강화와 자주성 유지 측면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지만, 보수적 대외 정책으로 개항을 늦추고 일본의 침략 구실을 제공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생애는 19세기 조선이 겪은 내부적 모순과 외세의 압력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그의 강직한 성격과 정치적 역정은 오늘날까지 역사적 논쟁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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