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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소평가된 문민정부 김영삼 대통령 업적

by 글로벌에디터 2024.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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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소평가된 문민정부 김영삼 대통령 업적

김영삼 전 대통령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에 입학해 1951년 졸업했습니다. 재학 도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학도의용군에 입대해 국방부 정훈국 대북방송 담당 요원으로 활동했습니다. 김영삼은 정치에 입문한 후, 야당 의원으로서 활동했습니다. 신민당을 창당 할 당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정치활동이 금지되었고, 군정연장 반대 시위에 참가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행동하는 정치인으로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민주화운동의 양대산맥을 이루며 군부정권과 독재에 맞서 대항했고,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다가 군정부로 부터 감금과 정치활동 금지를 수차례 당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1927~2015)은 대한민국의 제14대 대통령으로서, 1993년부터 1998년까지 재임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많은 개혁과 변화를 강력하게 추진했습니다. 그의 업적은 한국 현대사에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으며, 특히 민주화와 경제 개혁에 있어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재임 시절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되돌아 보겠습니다.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김영삼

1. 하나회 척결 해체

김영삼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첫 민간 출신 대통령으로 스스로를 문민정부라고 칭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군부의 정치 개입을 철저히 차단하기 위해 가장 먼저 군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1993년 대통령 취임 후 11일 만에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을 포함한 군 고위 인사들 40여명을 대거 물갈이하고 군부정치 사조직 ‘하나회’를 해체했습니다.

박정희 지원으로 만들어진 하나회 사조직

하나회는 박정희의 지원 아래 영남지방 사람들로 조직된 사조직이며, 하나회는 쿠데타를 통해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을 창출시켰고, 두명의 군사정권 동안 하나회는 군내 외 안팎으로 중요 핵심자리를 독차지하며 권력과 부를 누렸습니다. 김영삼대통령은 군장성을 끌어내려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을 종식시켰습니다.

2. 금융실명제와 지방자치제 실시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은 ‘금융실명제’를 도입하여 경제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금융실명제는 모든 금융 거래를 실명으로 해야 하며, 이를 통해 자금 세탁과 탈세를 방지하고 투명한 금융 거래를 촉진하는 제도입니다. 이는 경제의 투명성을 높이고, 국가 경제의 건전성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은 지방자치제를 전면적으로 실시하여, 지역 주민들이 직접 자신들의 지방정부를 선출할 수 있는 민주주의 체제를 마련했습니다. 이는 민주주의의 뿌리를 지역사회까지 확장시키는 중요한 조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3. 공직자 부정부패 척결

김영삼 대통령은 경제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며 한국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부정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공직자들의 비리를 엄격히 처벌했습니다. 대표적으로 그의 아들 김현철이 연루된 부패 사건에 대한 강경한 대응은 그가 부패 척결에 대해 매우 단호한 입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줬습니다. 또한 공직자 재산 공개 제도를 도입하여 공직자 재산의 투명성을 강화했습니다.

군사정권으로 독재한 전두환, 노태우

4. 광주 5.18주범 심판

김영삼 대통령은 군사 독재의 잔재를 청산하고자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추진했습니다. 이 운동의 일환으로, 5.18 민주화 운동의 진상 규명과 관련자 처벌이 이뤄졌으며,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구속 수사도 단행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민주화 운동의 정당성을 재확인하고, 역사적 책임을 묻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율은 97%에 육박했습니다.

5. 외교와 대북정책

김영삼 대통령은 외교와 대북정책에서도 중요한 변화를 이끌어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남북 간의 화해와 협력을 강조했으나, 북핵 문제와 관련된 긴장으로 인해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1994년 북한의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예정된 남북 정상회담이 무산되면서 남북 관계는 경색되었으나, 김영삼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원칙적 접근을 고수했습니다. 또한,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미국과의 관계를 공고히 했습니다. 또한, OECD가입과 함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에 참여하며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강화했습니다.

조선총독부 철거

6. 일본의 잔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시원한 결단! 70년동안 경복궁을 가로막고 우리의 정기를 억눌러 온 일제의 잔재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여 당시에 국민들로부터 90% 이상의 지지율을 얻었을 정도로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김영삼대통령은 평소에도 조선총독부 건물을 볼때마다 "저놈의 건물 빨리 없애버려야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합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일본이 도발을 해 올 때,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줘야 한다"는 명언을 남겼을 정도로 강력하고 단호히 대응했습니다. 안타까운건 친일파 청산까지는 하지 못했던 점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김영삼대통령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적 평가

김영삼 대통령은 재임 말기인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았습니다. 외환위기는 한국 경제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이 위기에서 한국이 구조 조정을 단행하고 외환 시스템을 개혁하면서 향후 경제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김영삼 정부는 외환위기 상황에서 국제통화기금(IMF)과의 협상을 통해 구조 조정과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세계화’를 국정의 중요한 기조로 삼았습니다. 그는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경제, 문화,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화 전략을 추진했습니다. 특히, 교육 분야에서는 외국어 교육 강화와 국제 교류 확대를 추진했으며, 경제적으로는 무역 자유화를 통해 세계 경제와의 접촉을 넓혔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민주주의 발전과 군부 정치 개입 종식, 그리고 다양한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한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습니다. 특히, 그의 군부 개혁과 금융실명제 도입은 대한민국 정치와 경제 구조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를 몰고 오고 이에 대한 대응에 있어서는 비판도 적지 않습니다. 경제 개방과 세계화를 강조했지만, 당시의 경제 시스템의 허점을 간과한 것이 위기의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합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재임 기간 동안 대한민국은 정치적 민주화를 공고히 하고, 경제적 구조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새로운 민주주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의 업적은 오늘날 대한민국이 경제적, 정치적 안정성을 구축하는 데 중요한 기초를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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