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대 역사상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유방의 애첩 척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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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의 애첩 척부인

중국 고대 역사상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유방의 애첩 척부인

"척부인"은 전한 초기의 인물로, "유방"의 애첩이자 "유여의"의 생모입니다. 그녀의 비극적인 삶과 잔혹한 최후는 중국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척부인은 정도(현재의 산둥성 딩타오 현) 출신으로, 척씨 또는 척희라고도 불렸습니다. 그녀가 유방과 만난 시기는 기원전 208년경으로 추정되며, 이는 초한전쟁 중이었습니다.

유방이 척부인을 만나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상체를 뒤로 젖혀 추는 초나라 춤을 잘 추어 유방의 눈에 띄었다는 설과 유방이 전쟁터를 돌아다니던 중 우연히 만났다는 설이 있습니다. 어떤 경위로든, 척부인은 곧 유방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되었습니다.

 

척부인

유방의 첩이 된 척부인은 유방에게 아들 "유여의"를 낳았고, 이로 인해 그녀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척부인의 아들 유여의는 대왕(代王)에 이어 조왕(趙王)으로 봉해졌고, 유력한 황태자 후보로 거론되었습니다. 척부인은 유방이 친정을 할 때마다 여의를 태자로 세워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유방 역시 당시의 황태자였던 유영(劉盈)의 자질에 의문을 품고 있었고, 활발한 성격의 여의를 더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그러나 유방이 황태자 교체 의사를 중신들에게 언급했을 때, 모든 중신들이 반대했습니다. 특히 유방의 신임이 두터웠던 장량의 계책으로 4학사가 나와 태자를 유지할 것을 설득했고, 결국 유방은 황태자 교체 계획을 철회했습니다.

 

유방 사후의 비극

유방이 기원전 195년에 사망하고 유영이 한 "혜제"로 즉위하면서 척부인의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혜제의 생모인 "여태후"는 척부인 모자에 대한 원한과 미움을 품고 있었고, 이제 그 복수를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여태후의 복수는 너무나 가혹하고 잔인했습니다.

척부인

척부인을 영항(궁녀들의 감옥)에 감금하고 하루 종일 쌀을 찧는 형벌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조왕으로 있던 척부인의 아들 유여의를 궁으로 불러들여 혜제가 없는 틈을 타 독살했습니다. 척부인에게 끔찍한 고문을 가했습니다. 손과 발을 모두 잘랐으며 눈알을 뽑아 장님으로 만들었습니다. 귀에 뜨거운 유황을 부어 귀머거리로 만들었으며, 약을 먹여 벙어리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고문당한 척부인을 돼지우리에 던져놓고 '인간돼지(人彘)'라고 불렀습니다.

 

이 잔혹한 행위는 중국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혜제는 이 '인간돼지'를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아 병이 생겼고, 1년 이상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정치의 실권은 여태후에게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척부인

척부인의 비극적인 최후는 중국 역사에서 권력 투쟁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녀가 겪은 고통은 "영항가(永巷歌)"라는 노래로 "한서(漢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노래는 그녀의 비참한 처지를 애도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척부인의 이야기는 또한 여성의 정치 참여와 그에 따른 위험성, 그리고 당시 중국 사회의 가부장적 구조와 권력의 본질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그녀의 삶은 한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척부인의 이야기는 권력의 무상함과 인간의 잔인성을 보여주는 비극적인 예시입니다. 그녀의 삶과 죽음은 중국 역사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교훈적인 사건 중 하나로,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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